요한 크루이프 폐암 투병 끝 사망

요한 크루이프 폐암 투병 끝 사망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명으로 꼽히며 네덜란드 토털사커 전성기를 이끌었던 요한 크루이프가 암 투병 끝에 24일 별세했다고 그의 재단이 밝힌 가운데, 전 세계 축구팬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전설적인 축구스타 요한 크루이프(68)가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크루이프 대변인도 이날 크루이프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숨을 거뒀다고 말했는데요.

 

유럽 내의 다수 매체들도 이 같은 요한 크루이프 사망 사실을 연이어 보도하며 전설의 마지막 길에 애도를 표했습니다.

 

요한 크루이프 커뮤니티 - 사진

 

크루이프는 지난달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치료가 잘되고 있으며 상태도 호전되고 있다고 알린 바 있어 그의 사망 소식은 팬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는데요.

 

요한 크루이프는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준우승으로 이끌며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그는 당시 획기적인 축구 전술로 꼽혔던 '토털사커'의 창시자로서, 유연한 기술과 탁월한 축구 센스로 한 시대를 풍미했는데요.

 

AP통신에 따르면 요한 크루이프 재단은 이날 크루이프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숨을 거뒀다고 말했습니다.

 

 

크루이프는 1970년 네덜란드의 토털 사커를 구축한 대표적인 축구 레전드로 아약스(네덜란드)와 FC바르셀로나(스페인)에서 선수 생활을 했는데요.

 

 

은퇴 후에는 1996년까지 감독으로서 바르셀로나를 이끌었고, 바르셀로나 명예회장과 아약스 이사 등을 맡기도 했습니다.

 

크루이프는 경기가 있는 날에도 담배를 피우는 애연가이자 매일 3갑에 달하는 담배를 피울 정도로 좋아했다고 하는데요.

 

1991년 심장 이상으로 응급 상황을 겪은 이후에는 금연 캠페인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공을 가지면 내가 주역이다. 결정하는 것도, 창조하는 것도 나다."

 

 

1957년 크루이프는 10살이 되던 해 네덜란드 명문 AFC아약스 유소년팀에 입단하여 1965-66 시즌부터 진가를 발휘하였는데 10월 24일 AFC DWS전에서 2골을 넣은 이후로 본격적으로 주전으로서 자리를 굳힌데 이어 65-66 시즌에 그는 23경기에서 무려 25골을 넣어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는데요.

 

이 당시 크루이프 등번호는 14번을 고집했는데, 이때까지만해도 14번은 주로 후보선수들이나 다는 번호였습니다.

 

 

원래 9번을 주려고 했던 감독이 이유를 묻자 크루이프는 "아무도 달지 않은 이 번호를 내 번호로 만들기 위해서" 리고 답했는데요.

 

결국 14번은 크루이프를 상징하는 번호가 됩니다.

 

이어 티에리 앙리가 14번을 고집하는 것도 크루이프의 영향을 받은 것 이라 볼 수 있는데요.

 

 2007년 아약스는 크루이프의 14번을 영구결번으로 지정합니다.

 

 

1966-67 시즌 아약스는 다시 리그 우승을 한데 이어 KNVB컵을 우승함으로써 더블을 달성했고 크루이프는 그 시즌에 33골을 넣어 득점왕이 되었는데요.

 

1967-68 시즌 역시 아약스가 우승하였으며 크루이프는 '올해의 네덜란드 축구 선수'에 뽑혔습니다.

 

 

1969년 5월 28일, 크루이프는 챔피언스리그 결승에도 출전하였으나, AC 밀란에게 4:1로 패하고 말았는데요.

 

그러나 아약스는 1970-71, 71-72, 72-73 3시즌 연속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성공했고, 1971년에 크루이프는 첫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됩니다.

 

 

1972년엔 전대미문의 5관왕(리그, 챔피언스리그, 컵대회, 인터콘티넨탈컵, 슈퍼컵 동시우승)을 이루는 쾌거를 기록하기도 하는데요.

 

아약스에서의 활약을 주의깊게 지켜본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는 동시에 크루이프에게 러브콜을 보냈고 크루이프는 독재자(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팀에서 뛰지 않겠다며 레알 마드리드의 제의를 거절하고는 대신 FC바르셀로나를 택하게 됩니다.

 

 

이적료가 약 200만 달러였는데, 엄청난 금액이여서 스페인 당국의 허가를 받지 못하고 결국 바르셀로나는 크루이프를 농기계의 일부로 등록해 데려왔다고 하는데요.

 

당시 침체기를 겪던 바르셀로나로 이적하자마자 레알 마드리드를 5-0으로 완파하는등 리그 16골의 맹활약으로 1973-74시즌 리그우승을 기록하고 동시에 두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합니다.

 

 

1974년 참가한 월드컵 결승전은 네덜란드와 서독의 시합이었는데 원래 축구 변방이었던 네덜란드는 미헬스와 크루이프의 토탈 풋볼로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결승까지 안착했는데요.

 

처음엔 네덜란드를 무시했던 사람들도 토탈 풋볼을 보고는 네덜란드의 승리를 예측했으나 아쉽게도 네덜란드는 베켄바우어의 활약에 1-2로 패배했지만 1974년 발롱도르는 베켄바우어가 아닌 요한 크루이프의 차지였고 세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한 크루이프는 자기자신을 '수퍼스타'라고 칭하게 됩니다.

 

 

베켄바우어는 월드컵 우승뿐만 아니라 챔피언스리그와 분데스리가를 모두 재패하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달성했고 모두들 바켄바우어가 당연히 수상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발롱도르는 모든것을 이룬 카이저가 아닌 수퍼스타의 차지가 되었는데요.

 

베켄바우어는 '더 이상 무얼 해야하는가?'라며 억울함을 토로했다고 하니 당시 수퍼스타 크루이프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해볼 수 있을듯 합니다.

 

 

한편, 요한 크루이프는 1970년 네덜란드의 토털사커를 구축한 대표적인 축구 전설로 토털사커는 말그대로 전원 수비, 전원공격을 일컫는데요.

 

공수 구분 없이 그라운드 선수 전원이 공수 역할을 하는 것으로 토탈사커는 한국이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4강까지 오르는데 결정적 전략으로 응용되기도 했습니다.

 

 

거스 히딩크 당시 한국 국가대표감독도 강력한 압박 속에 전원 공격 전원 수비를 주문하기도 한 바 있는데요.

 

놀라운건 크루이프는 엄청난 애연가라 경기가 있는 날에도 하프타임이 되면 어김없이 담배를 폈고 훈련하는것도 싫어해서 연습조차 안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피지컬 트레이닝에도 관심이 없었을 뿐만아니라 크루이프는 "축구는 몸이 아닌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이 모든 업적을 이뤄냈는데요.

 

그러나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명이였던 전설적인 축구스타 그도 결국은 사람이였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68세의 일기로 별세한 요한 크루이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